
주말에 볼 드라마가 없어서 고민이신가요? 저도 미용 일을 잠시 쉬던 4개월 동안 그 고민을 정말 진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반쯤 기대 없이 틀었다가 결국 밤을 새워버린 드라마가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입니다. 유치한 로맨스라고 넘기기엔, 이 드라마는 생각보다 훨씬 중독성이 강합니다.
핵심 줄거리
완벽한 신붓감과 치명적인 독신남의 '계약 연애'
이야기는 19세기 섭정 시대 영국 런던, 귀족 가문들의 자녀들이 배우자를 찾는 '사교계 시즌'이 열리면서 시작됩니다. 브리저튼 가문의 큰딸 다프네 브리저튼은 아름다운 외모와 기품 있는 태도로 샬럿 왕비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사교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큰오빠 앤서니의 과도한 간섭과 깐깐한 기준 때문에 정작 괜찮은 구혼자들은 다프네의 곁을 떠나고, 원치 않는 상대만 집착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런던으로 돌아온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사이먼 헤이스팅스 공작이 등장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엄격하고 냉혹했던 아버지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후사도 남기지 않아 가문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한 지독한 독신주의자입니다. 당연히 수많은 귀족 어머니들의 극성스러운 구혼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죠.
서로 다른 고민을 안고 있던 두 사람은 무도회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서로의 목적을 위해 '가짜 연애(계약 연애)'를 제안합니다.
다프네는 인기 많은 공작의 관심을 받음으로써 다른 매력적인 남성들의 질투를 유발해 몸값을 높이려 했고,
사이먼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처럼 보여 귀족 영애들과 어머니들의 귀찮은 구혼 공세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완벽한 윈-윈(Win-Win) 전략처럼 보였던 이 가짜 연애는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깊은 내면과 아픔을 공유하면서 점차 진짜 감정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리젠시 시대 배경이 주는 압도적인 비주얼
브리저튼의 배경은 19세기 초 영국의 리젠시 시대(Regency Era)입니다. 리젠시 시대란 조지 3세가 정신 질환으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왕세자 조지 4세가 섭정을 맡았던 1811년부터 1820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귀족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때로, 복식사(服飾史)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시대입니다.
제가 직접 시청해보니, 이 시대 배경이 주는 비주얼이 정말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저는 디즈니 덕후 성향이 좀 있어서 화려하고 동화 같은 배경에 특히 약한 편인데, 브리저튼은 그 기준에서 봐도 압도적이었습니다. 여주인공 다프네의 집 앞을 가득 채운 보라색 꽃과 건물이 어우러지는 장면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드라마 배경이 아니라 실제 정원 사진집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여성 캐릭터들의 코스튬(costume), 즉 시대 의상을 보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리젠시 시대의 여성 드레스는 엠파이어 라인(Empire line) 실루엣이 특징입니다. 엠파이어 라인이란 허리선을 가슴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린 하이웨이스트 형태로, 고대 그리스 복식에서 영향을 받은 스타일을 말합니다. 사교계 시즌(Season)이 배경이다 보니 드레스의 자수와 장식 수준이 회차마다 올라가서, 장면 하나하나 캡처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사교계 시즌이란 귀족 가문의 미혼 자녀들이 런던에 모여 파티와 무도회를 통해 배우자를 찾는 시즌을 의미합니다. 드라마 속 다프네 브리저튼은 이 사교계 데뷔 시즌에 여왕으로부터 '다이아몬드' 칭호를 받으며 최고의 신부감으로 주목받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시기 상류층 여성의 삶은 결혼이라는 목표 하나를 위해 설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출처: 대영도서관 리젠시 시대 자료).
브리저튼에서 제가 특히 감탄했던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프네 집의 보라색 등나무 꽃이 외벽을 감싸는 외관 장면
- 여왕이 주관하는 데뷔 무도회의 촛불 조명과 드레스 연출
- 헤이스팅스 공작의 저택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
- 사교계 시즌 내내 등장하는 캐릭터별 드레스 변화
계약 연애 스토리, 유치한데 왜 못 끊을까
솔직히 처음 스토리 설정을 들었을 때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계약 연애라니, 한국 로맨스 드라마에서도 수십 번은 봤던 소재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틀어놓으니 전혀 유치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제 경험상 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스토리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신원 미상의 가십 작가 '레이디 휘슬다운'이 다프네를 저격하는 기사를 쓰면서 그녀의 혼사가 막히고, 궁지에 몰린 다프네는 헤이스팅스 공작 사이먼과 가짜 연애를 시작합니다. 사이먼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는 방탕한 귀족이고, 다프네는 결혼만을 위해 준비된 신부입니다. 이 둘이 서로를 이용하는 쇼윈도 커플로 사교계를 속이는 설정이 메인입니다.
원작은 줄리아 퀸이 쓴 로맨스 소설 시리즈로, 국내에는 '공작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제목만 봐도 학창 시절 친구들과 돌려 보던 그 느낌이 물씬 납니다. 실제로 이 소설 시리즈는 미국 출판 시장에서 수백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로맨스 소설 장르에서 서사 구조(narrative arc)의 모범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갈등에서 절정, 해소로 이어지는 흐름을 설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출처: 미국 출판사 협회 자료).
브리저튼의 전개 속도는 요즘 드라마 기준으로 꽤 빠른 편입니다. 총 8개 에피소드, 회차당 러닝타임 약 60분으로 구성되어 있어 주말 몰아보기에 딱 맞는 분량입니다. 저는 일을 쉬는 동안 시간 감각이 없어서 한 번에 다 봐버렸는데, 다 보고 나서 새벽 2시인 걸 깨달았습니다.
무도회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팝송을 현악 합주(string ensemble) 버전으로 편곡한 곡들이 배경음악으로 쓰이는데, 현악 합주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현악기만으로 구성된 연주 방식을 말합니다. 우아한 무도회 장면에서 귀에 익은 팝 멜로디가 들려오면 자기도 모르게 노래 제목을 맞추게 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아리아나 그란데 곡이었는데, 이 부분은 정말 재미있는 장치였습니다.
브리저튼을 한 줄로 압축하면, 학창 시절 친구들이 돌려 보던 로맨스 소설을 고퀄 비주얼로 실사화한 드라마입니다. 스토리가 예측 가능한 지점이 있더라도, 화면이 너무 예쁘고 전개가 빨라서 끊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시각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편이라면 1화만 봐도 끝까지 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쉬는 날 뭘 볼지 고민이라면, 일단 1화를 틀어보시길 권합니다. 8화가 끝날 때쯤이면 시즌 2를 바로 검색하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