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널을 멍하니 돌리다가 우연히 마주친 영화 한 편이 평생 이상형을 바꿔놓은 경험, 혹시 있으신가요? 저는 초등학교 1~2학년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1994년작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였고, 그때 화면 속 브래드 피트는 제 눈에 완전한 왕자님이었습니다.
첫인상: 어린 눈에 담긴 브래드 피트
솔직히 그 나이에 영화의 서사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 없습니다. 흑사병이 만연한 18세기 뉴올리언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뱀파이어의 실존적 고뇌 같은 건 전혀 몰랐죠. 그냥 화면 속 브래드 피트가 너무 반짝반짝해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꽤 오랫동안 제 이상형은 브래드 피트였습니다.
고딕 호러(Gothic Horror)라는 장르 특유의 어둑하고 습한 분위기 속에서도 브래드 피트만 유독 빛나 보였던 건 아마 조명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여기서 고딕 호러란 공포와 낭만, 죽음과 아름다움을 한데 섞어 묘사하는 서양 문학과 영화의 오래된 장르를 말합니다. 이 영화가 그 정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봤을 때 저는 꽤 놀랐습니다. 브래드 피트만 보이던 화면에 젊은 톰 크루즈가 그렇게 존재감 있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제대로 보게 됐거든요. 어릴 때는 그냥 나쁜 사람 정도로만 느꼈던 레스타드 역의 톰 크루즈가, 다시 보니 오히려 이 영화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중심축이었습니다. 저때가 톰 크루즈의 리즈시절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 세 얼굴
이 영화를 단순한 뱀파이어 장르물에서 끌어올린 가장 큰 힘은 역시 배우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다시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배우들이 진짜 대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작비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 6천만 달러, 흥행 수익은 전 세계 총 약 2억 2,400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이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건 스케일이나 스토리 이전에 배우들의 집중력이 먼저였다고 봅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배우 세 명을 꼽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 브래드 피트 (루이 역): 촬영 6개월을 "6개월간의 어둠"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대부분 야간 촬영에 한겨울 환경이 겹쳐 실제로 우울증에 빠질 정도였다고 밝혔습니다. 그 고통이 루이의 표정에 그대로 스며들었을지도 모릅니다.
- 톰 크루즈 (레스타드 역): 원작자 앤 라이스는 처음에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의 역할을 바꿀 것을 제안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톰 크루즈의 연기를 공개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배우에 대한 원작자의 평가가 뒤바뀐 드문 사례입니다.
- 커스틴 던스트 (클로디아 역): 영원히 아이의 몸에 갇혀 어른이 될 수 없는 뱀파이어 클로디아를 연기하며 골든 글로브 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Nominated)되었습니다. 여기서 노미네이트란 시상식 수상 후보로 공식 지명되는 것을 말하며, 당시 커스틴 던스트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연기력이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 산업에서 흥행을 예측하는 지표 중 하나로 오프닝 위크엔드 수익(Opening Weekend)이 있습니다. 이는 개봉 첫 주말 3일간의 극장 수익으로, 영화의 초기 시장 반응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입니다. 이 영화는 당시 11월 개봉 최고 기록이었던 1,930만 달러를 단숨에 넘어 3,640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존재의 고뇌: 영원한 삶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 영화가 진짜로 묻고 있는 게 뭔지 한번 생각해보셨나요? 저는 이 영화의 핵심 질문이 "영원히 사는 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라고 생각합니다.
레스타드는 영원한 삶을 즐기라고 루이를 끊임없이 설득합니다. 본성에 충실하면 된다는 논리죠. 하지만 루이는 처음부터 인간의 피를 거부하고, 쥐와 닭의 피로 처절하게 버텨냅니다. 자기 안의 괴물성을 끝까지 부정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낀 장면은 루이가 흑사병을 앓고 있는 어린 클로디아를 무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살기 위해 저지른 행위였지만,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어린 생명을 영원한 저주 속에 가두어버린 죄책감이 루이를 평생 따라다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앙가주망(Engagement), 즉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짊어지는 태도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쉽게 말해 루이는 선택을 했고, 그 결과를 끝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살기 위해 죄를 짓고, 그 죄책감 속에서 또 살아남아야 하는 자기 모순이 영화 전체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은 앤 라이스가 1976년 딸을 잃은 슬픔을 계기로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상실과 죄책감,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그토록 짙게 배어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겁니다. 문학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서사 깊이에 대한 연구에서도, 작가의 개인적 상실 경험이 반영된 작품일수록 등장인물의 내면 서사가 정교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학회).
어른이 된 몸으로 다시 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어릴 때와 완전히 다른 영화였습니다. 브래드 피트 덕분에 처음 보게 됐지만, 결국 마음에 남은 건 루이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클로디아의 기억이었습니다. 고전 영화를 다시 꺼내볼 기회가 생긴다면 이 영화를 먼저 추천드립니다. 처음 봤을 때 몰랐던 것들이 분명 눈에 들어올 겁니다.